2010. 11. 28.

반성 : 뉴 투어리즘 new tourism



 어떤 예술에서 느낀 경외심을 스스로에게 설명하고 싶은 마음, 또 그 미의식과 문화에 대해 알고싶어서 사람들은 이런저런 분석을 하고 평을 하곤한다. 아주 목이 마를때 맛있는 정체불명의 물을 마시고, '도대체 이 물은 뭐지? 뭐길래 이렇게 시원하고 맛있지? 어디서 누가 갖다준 거야? 이 물이 나는 샘은 어떤 곳일까? 어떻게 하면 이런 맛있는 물이 될 수 있었을까?' 등등의 의문이 생기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반대로 아무생각없이 마신 한모금의 물 때문에 구역질이 나고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으면, '도대체 이 물은 뭐야? 뭐길래 이렇게 독한 거지? 물처럼 보이지만 물이 아닌거 아닐까? 무슨 나쁜 마음으로 물에다 고약한 걸 섞었을까?' 이런 의구심이 생기겠지. 이런 경우엔 경고를 통해 다른 사람이 같은 재앙을 겪는 것을 미리 방지할 수도 있다. 뉴 투어리즘에 대한 이야기는 후자 쪽이다.


 첫번째 투어리즘은 순진하고도 잔인한 유럽인들의 작품이었다. 식민지 침략과 약탈을 '대항해 시대', '신세계의 발견'이라 기뻐하던 유럽인들은 지루하고 우울하고 척박한 삶에 활기를 찾고 의욕적으로 제국을 확대해 나갔다. 언제나 막다른 골목에서 초조해하며 손톱을 물어뜯고 있던 예술가들에게도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앞다투어 이국적인 모티브를 배껴와 살롱에서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 투어리즘은 빠른 속도로 발전해 나간다. 곧 세계는 유럽과 유럽이 아닌것에서 근대와 근대화 되지 않은 것으로 변했다. 언제까지나 타인이라고 생각했던 아시아인, 아메리카인, 아프리카인이 유럽인의 세계에 편입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기준이 필요해진 것이다. 아시아인, 아메리카인, 아프리카인도 '근대'의 기준을 통과하면, 예를 들어 유럽의 언어를 사용하거나, 양복을 입는다거나, 고등교육을 받는다거나, 제국의 가치와 체제를 이해한다거나 하면 근대화된 세계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체제 개편 이전, 예술가들은 고작 모티브를 끌어오거나 이국의 미의식을 소개하거나, '신세계'의 섬세한 문화를 미신으로 왜곡하는 정도의 단편적인 작업을 보여줄 뿐이었다. 그러나 영리한 이들은 금방 투어리즘을 보다 전략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변덕스런 취향들이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취향들이 아프리카에 관심을 갖는다고 하여 아프리카를 보여주는 것은 촌스런 짓이었다. 그들은 좀 더 익숙한 방식으로 다듬어진, 그러나 아주 지루하지는 않아서 타인에게 자랑할 수 있는 작품을 원했다. 그래서 같은 미국인이라 해도 아프리카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백인남성인) 피카소 pablo picasso는 fine art 였고 아프리카에 뿌리를 둔 (흑인여성인) 해리엇 파워스 harriet powers는 folk art 였던 것이다. 취향들은 남들이 모르는 새로운 것을 원하긴 했지만 근대화된 세계의 정체성을 위협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모-던한 것을 원했다. 


 새로운 투어리즘은 첫번째 투어리즘과 그 출발점부터 달랐다. 취향들은 이제 새롭고 세련된 것 뿐만 아니라, 새롭고 세련된것을 발견하는 재치있고 똑똑한 자기자신을 원했다. 이에 예술가들은 새롭고 세련된것을 발견하여 재치있고 똑똑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생각까지 하는 예술가 자기자신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제 예술은 격이 달라졌다. 예술을 안다는 건 이 사람이 새롭고 세련되고 재치있고 똑똑할 뿐 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올바른 생각까지 갖고 있다는 증거가 되었다. 예술가들은 한층 더 난폭해지기 시작했다. 레퍼런스, 샘플링, 인용, 출처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에 예술적 생명력을 부여한 것은 바로 그것을 조합해 낸 예술가 니까!  방법론 따위에 섬세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방법론의 빈약함을 상쇄할 만한 강한 충격을 주면 되니까! 


 이 새로운 투어리즘은 매우 사소한 것에서 부터 작품의 핵심까지 그 변주도 다양하다. 예술가가 어떤 어린이 (노동자, 장애인, 여성, 제3세계 사람.. 그 외 어떤 단어로 바꾸어도 괜찮다)의 작품이 훌륭하다고 소개할 때도, 그 주인공의 특별함에 찬사를 보내긴 하지만, 그를 정말 중요한 자리에 세우지는 않는다. 주목 받아야 할 것은 이것을 발견한 예술가의 안목이니까. 심지어 그의 작품을 예술에 활용해도 공동 작업자로서의 실질적인 이득(뿐만 아니라 인지도의 상승등 부수적이나 중요한 이득까지) 은 나누지 않아도 괜찮다. 그는 예술가가 아니니까! 사회적인 교류가 많은 작업을 할 때도, 그 교류의 지도 전부는 중요하지 않다. 실질적인 변화는 중요하지 않다. 있는 그대로 보지 않아도 된다. 중요한 것은 예술적인 성장이니까! 


 근대화의 벽을 넘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투어리즘을 이해하지 못한다. 투어리즘의 태도를 이해하고 응용하는 것은 근대 문명의 벽을 넘어 현 세계에 편입한 사람만의 특권이다. 이들의 관광은 대단한 자신감에 차 있다. 철저한 관광객의 입장을 취해서 오히려 현지인처럼 보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 일방적인 소통의 벽이 계급 사이에서도 작용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다른 계급을 관광하는 뉴 투어리즘이 대단한 인기인 것 같다. 이런식으로 새로운 투어리즘의 변주는 끊이지 않는다. 


 뉴 투어리즘의 빛나는 별들은 하늘을 빼곡히 매우고 있다. 
내가 할 일은 이 불쾌한 별빛들을 조심스럽게 피해서 나의 꽃을 조용히 피우는 일이겠다.
따라서 이 글은 앞날의 행운을 비는 부적 같은 거라 생각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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